스포츠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개인이나 단체가 속력과 지구력, 기능 따위를 겨루는 활동입니다.
이 같은 활동은 스포츠를 몸소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관심과 흥미를 일깨우고 경기라는 형태로 대중 생활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승패를 가늠하는 등수와 메달이 등장하는데요. 메달의 기준은 1904년 하계 올림픽부터 채택됐습니다.
치열한 경기에서 이기고, 메달을 따려면 선수는 오랜 시간의 고된 훈련을 이겨내야 하고, 동료 선수들과의 협력과 지도자와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선수단의 유대관계가 너무 강하다보니 폐쇄적으로 보일 때도 있습니다.
“수영이 너무 좋은데, 수영을 하려면 1등을 해야 하나요?” “하기 싫고 도망가고 싶을 때
잡아주고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야”
스포츠계의 대물림되는 폭력 문제를 다룬 영화 ‘4등’의 대사인데요. 4년 전 영화가 그린 현실은 2020년에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26일, 소속팀 감독과 팀 닥터, 선배의 가혹 행위로 오랜 시간 고통 받은 철인 3종 경기 최숙현 선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와 경찰 등 무려 6군데에 도움을 청했지만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죠.
매번 사과와 대책발표를 하고 있지만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스포츠계 폭력은 끊이지 않고 악순환 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쇼트트랙 국가 대표팀 조재범 코치의 성폭행 사건에 대한 고발이 있었고 스포츠계 폭력 근절을 위한 대책마련이 촉구된 터라 더욱 충격적입니다.
폭력은 어떤 이유에도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폭력은 늘 자기합리화에 능합니다.
체육계에서 폭력문제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다 너를 위해서야...”, “폭력은 훈련의 일부분이야..”, “나는 다른 사람들하고는 달라” 라고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자기합리화가 심해질수록 마치 벽처럼 외부의 반응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폭력이 문제의식없이 반복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3)
예수님은 이미 예전부터 밖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의 문제를 보라고, 절대 밖보다 안이 작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의 체육계 폭력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손가락이 밖으로만 향하고 있는지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사제의 눈>은 ‘폭력이 반복되는 이유는?’이였습니다. 고(故) 최숙현 선수의 명복을 빕니다.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