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획특집

유경촌 신임 주교 삶과 신앙

성품 유하고 우수한 모범생, 노래 실력 뛰어나

2014.01.05발행 [1247호]

성품 유하고 우수한 모범생, 노래 실력 뛰어나

▲ 소신학교 교정에서 동기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유 주교. 가운데 앉은 이다.
▲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원 시절인 초등학교 2~3학년 때.
▲ 유경촌 주교가 20년간 타고다닌 은색 프라이드. 유 주교의 근검절약하는 생활습관을 보여준다.
▲ 12월 30일 서울대교구 명일동성당 만남의 방에서 열린 임명 축하식에서 한 신자가 꽃다발을 전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제 꿈꿔온 범생이

 유경촌 주교는 1962년 9월 4일 서울에서 고(故) 유탁(베드로)ㆍ박금순(루치아)씨 사이 4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2003년 선종한 한희동(그레고리오) 신부 모친과 유 주교 모친이 서로 이웃집이었는데, 서로 담을 허물고 대문
을 하나로 만들어 쓸 정도로 친하게 지내며 자연스레 천주교를 접했다.

 먼저 세례받은 둘째 누나를 따라 중학교 1학년 때 서대문성당에서 세례받은 유 주교는 그때부터 명동성당에서 복사를 서며 사제를 꿈꿨다. 서대문본당에는 중학생 복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78년 서울 성신고등학교(소신학교)에 입학, 일찌감치 하느님 부르심을 따르게 된다.

 성인전을 즐겨 읽었던 소신학교 시절은 물론, 대신학교(가톨릭대) 시절에도 유 주교는 늘 '범생이'(모범생)였다. 성품이 착하고 학교 성적도 매우 우수했으며, 누구와도 잘 어울렸기에 신학생들 사이에서 늘 '기준점'이 됐다. 유 주교는 신학생 때부터 성인처럼 살았기에 동기들 사이에서 '경촌이만 따라 하면 된다''성인 사제 되려면 경촌이처럼 하라'는 말이 나왔다. 신학생 때 별명이 '상뚜스(SANCTUS)'였을 정도다. 상뚜스는 '거룩한'이라는 뜻으로, 신학교에서 기도와 미사에 열심이며 신앙심이 투철한 친구를 농담조로 부르는 말이다. 동기 사제들은 "꿋꿋이 묵상하고 기도하던 (유 주교) 모습을 보면서 마음을 추슬렀던 기억이 난다"고 입을 모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신학교 운동장에 있는 굵은 모래를 신발에 넣고 다니며 스스로 고행(?)을 자처하기도 해 동기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유 주교를 신기한 듯 쳐다본 일화도 있다.

 대신학생 때 장애인들을 돕는 봉사활동에도 나섰고, 학업성적도 매우 뛰어났지만 유 주교에게 모범생 이미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 주교는 영세 이전인 초등학교 2~3학년 때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원으로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수녀들과 함께 가톨릭 합창을 공연했던 경력이 있어 노래를 매우 잘했다. 또 학교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마이크를 쥐고 사회를 도맡았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신학생 때 '십팔 번 곡'이었다는 후문이다.

 소신학교 때부터 동기인 강계원(군종교구 선봉대본당 주임) 신부는 "주교님은 소신학교 때부터 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줬던 사제다. 동기들이 '너는 큰 일을 할 거다'는 농담을 주고받았는데, 정말 주교가 됐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다양한 사목분야 경험한 겸손하고 검소한 사제

 유 주교는 사제가 되기 전인 1988년부터 4년 동안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원래 차동엽ㆍ맹제영 신부 등 4명이 유학 갈 예정이었으나, 4명 가운데 한 사제가 유럽이 아닌 다른 곳으로 유학 가는 바람에 유학자 명단에 없던 유 주교가 얼떨결(?)에 유럽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상트게오르겐대에서 '공의회적 과정에서의 창조질서 보전 문제'라는 주제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유럽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가 정의ㆍ평화ㆍ창조질서 보전이라는 주제로 교회 일치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때였다. '창조질서보전'이라는 주제를 교회 가르침이나 윤리신학적 가르침에서 살펴보는 것이 유 주교 주제였다.

 당시만 해도 유학길에 오른 신학생은 교구에서 거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학위를 취득할 때까지 거의 무일푼으로 생활했다. 검소하기로 유명한 독일인들 사이에서 공부하는 한국 신학생의 생활 역시 철저한 근검절약뿐이었다. 그때 생활 습관이 남아 있는 유 주교는 지금도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 동기 신부는 "(주교님은) 아직도 속옷을 손수 꿰매 입으며, 승용차도 20년이 다 된 은색 프라이드"라고 말했다.

 1998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유 주교는 1999년 잠시 목5동본당 보좌신부로 사목하다 1년도 못돼 가톨릭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원감으로 신학생들 생활지도를 맡으며 신학교 150년사를 편찬하는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경험하게 된다. 2008~2013년에는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장을 지내며 「서울대교구 규정집」 등을 펴내기도 했다. 지난해 8월 27일 명일동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은 유 주교는 불과 4개월여 만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됐다.

 동기 박선용(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 부소장) 신부는 "주교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어려운 이들과 아파하는 이들을 품을 수 있는 좋은 성품을 지니셨다"며 "동료사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을 갖고 사목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명일동본당 김영종(베드로 첼레스티노) 사목회장은 "주교님이 미사를 매우 정성껏 봉헌하시는 모습에 많은 신자가 감동했고, 좀 더 많은 이들과 만나고자 사목상담실을 새로 지으시며 열정적으로 사목하려던 차에 떠나시게 됐다"며 아쉬워했다.

이힘 기자 lensman@pbc.co.kr